로마서 3:1-8
하나님의 신실하심(3:1~4)
유대인의 영적 실패를 언급하고 나니 그런 유대인을 선택해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문제에 붙여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 곤욕을 당하십니다. 유대인의 특권은 하나님의 뜻을 펼쳐 나가는 말씀의 통로이자 도구라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가까이에서 그분의 말씀을 더 잘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유대인은 그들의 땅에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거부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불신이 하나님이 신실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될까요? 바울은 강력하게 부정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4절). 그들이 신실하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불충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 가까이에서 그분의 말씀을 더 잘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유대인은 그들의 땅에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거부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불신이 하나님이 신실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될까요? 바울은 강력하게 부정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4절). 그들이 신실하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불충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복음의 진의를 왜곡하는 궤변(3:5~8)
유대인의 실패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을 결코 폐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불의할수록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더욱 극명하게 대조돼 나타납니다. 사람의 신실함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나면 구원과 사랑의 결실을 맺습니다.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나면 진노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를 회복시키시는 주권적 역사는 그분의 의로우심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궤변으로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죄를 지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더욱 드러냈으니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악해지는 것이 좋겠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들이 이방 죄인들처럼 심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궤변이요 책임 회피요 억지에 불과합니다.
언제나 제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고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의롭고 신실하신 성품을 묵상하며 닮아가길 소원합니다.